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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토리&맛집

꽃샘추위 속 대전 유등천의 봄, 그리고 봄동 겉절이 한 그릇

by clickyourdream 2025. 3. 31.

3월의 마지막 날, 봄이 오려는지 겨울이 물러서기 싫은지, 바람 끝이 제법 매서운 하루였다. ‘꽃샘추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코끝을 스치는 찬바람에 움찔하게 된다. 그런 날엔 오히려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춥지만 눈부신 하늘과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길 위의 풍경이 나를 이끈다. 늦은 오후, 슬그머니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늘 그렇듯 유등천. 대전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걸어봤을 산책길이지만, 나는 오늘도 새삼스레 새로운 마음으로 천변을 걸었다.

대전 유등천변에서 산책하는 주민들의 모습 ⓒ Click Your Dream

꽃샘추위에도 살아있는 생명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만 멈춰 섰다. 하천을 따라 작은 갈대숲 속에서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오르는 새들의 무리. 찬바람 속에서도 봄이 오는 소리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건, 다름 아닌 이 생명들이다. 물수리인지 왜가리인지 구분은 잘 되지 않았지만, 서로를 부르듯 날갯짓하는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웠다. 천변을 따라 핀 개나리의 노란 얼굴은 아직 봉오리 상태였지만, 살짝 벌어진 꽃잎은 봄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려준다. 수양버들은 새순을 살포시 내밀고 있었고, 바람이 지나가자 작은 가지들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저 걷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랄까.

사람들의 표정도 눈에 띄었다. 아직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지만, 발걸음은 가볍고 미소도 많아졌다. 연인끼리 손을 맞잡고 걷는 이들, 조용히 이어폰을 낀 채 걷는 중년 남성, 반려견과 함께 달리는 젊은이까지. 유등천은 마치 대전 시민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한 장면 같았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풍경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이들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걷고 또 걷는다. 때로는 멈춰서 사진을 찍고, 때로는 나무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솜사탕처럼 흩어져 있다. 바람은 차지만 햇살은 따뜻해, 상반된 계절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익숙한 된장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누군가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배가 고파졌다. 걷는 내내 봄 향기와 함께 식욕도 같이 깨어나는 모양이다.

대전 유등천의 새들 모습 ⓒ Click Your Dream

오늘 하루, 작은 봄의 기록

이렇게 나의 하루는 꽃샘추위 속에서도 따뜻했다. 유등천의 바람, 사람들의 웃음, 새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내 손으로 만든 봄동 겉절이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마음을 데워주었다. 요란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아도 좋다. 계절은 그렇게, 혼자 걸어도 아름답고, 혼자 먹어도 감동적인 순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언제 또다시 꽃잎이 흩날리는 유등천을 걸을 수 있을까. 아마도 머지않아 진짜 봄이 완연해질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의 봄은 이렇게 소중하게 남겨두기로 한다.

전날까지 매섭던 꽃샘추위가 다소 물러간 듯했지만, 아직은 공기 속에 찬기가 스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등천 산책길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새들로 생기 넘쳤다. 포근한 햇살이 비치는 물가, 강바람이 스치는 벤치 옆으로는 운동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걷거나 조깅을 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천변의 철봉과 허리 돌리기 기구 앞에 모여 아침 인사를 나누며 몸을 풀고 있었고, 자전거를 탄 이들은 유유히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유등천은 대전 시민들의 일상 속 쉼표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각자의 리듬으로 자연과 호흡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특히 천변을 따라 조성된 운동기구는 이 지역의 건강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풀고, 다리를 스트레칭하며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정겹다. 사람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마음의 온도가 느껴지는 이곳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따뜻한 공동체의 정을 느꼈다.

유등천에는 봄이 시작됐다는 걸 말없이 알려주는 존재들도 있다. 강가의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노란 개나리와 분홍빛 진달래가 군데군데 꽃망울을 틔우고 있었다. 물가에 내려앉은 백로 한 마리, 물속을 헤엄치는 오리 떼,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은 사람들 틈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내가 자주 지나는 물가 돌다리 위에는 오늘도 조심조심 발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씽 하고 지나가는 자전거의 바퀴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다리 아래 멈춰 섰다. 이곳은 대전 시민들 사이에서는 '김 할아버지의 인생교실'로 불리는 명소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는 수백 장의 종이들이 빽빽이 붙어 있다. “진심은 통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남의 탓을 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자와 같은 문구들. 삶의 교훈이 담긴 짧은 글귀들은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잠시 머무르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매번 볼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 있는 걸 보면, 김 할아버지는 지금도 꾸준히 사람들을 위해 메시지를 남기고 계신 듯하다.

봄에 입맛을 돋구는 봄똥 겉절이 ⓒ Click Your Dream

봄동 겉절이 한 그릇의 위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 한민시장에서 사 온 봄동 한 포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오늘은 겉절이다.’ 봄동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자라 더욱 부드럽고 달다. 

 이맘때 가장 반가운 봄채소인 ‘봄동’을 정갈히 다듬고, 손으로 쭉쭉 찢어 깨끗이 씻은 뒤 천일염에 살짝 절여두었다가 물기를 툭툭 털어낸 다음에 고춧가루, 마늘, 멸치액젓, 매실청, 깨소금, 참기름 몇 방울까지 더해 조물조물 무쳤다. 만들면서도 향긋한 채소향에 입맛이 돌았다. 봄동은 비타민 C와 식이섬유가 풍부해 겨울 동안 떨어진 면역력을 끌어올려 주는 건강 식재료로, 겉절이로 먹으면 아삭하고 상큼한 맛이 일품이다. 김치보다 담그기 간단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어 요즘 같은 날씨에 밥상 위에 자주 오르게 된다.

순식간에 한 접시의 싱그러운 겉절이가 완성되었다. 밥솥에 있던 따끈한 밥 위에 봄동 겉절이를 올려 한입 베어 물었다. 밥 한 숟갈에 겉절이를 얹어 한 입 넣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아삭한 식감과 단맛, 그리고 짭조름한 감칠맛. 천변에서 본 새들의 생기와 버드나무의 부드러움이 그대로 옮겨온 듯한 맛이었다. 정갈하고 정직한 맛. 봄을 먹는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달큰하고 알싸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산책길에서 받은 자연의 에너지를 그대로 이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유등천을 따라 흐르던 봄바람, 새들의 노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봄의 한 가운데서 나만의 이야기를 새겼다. 봄은 어느새 그렇게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자연 속을, 따뜻한 밥 한 그릇 속을. 그리고 그 순간순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건 내가 직접 걸었던 유등천의 길이었다.
올봄이 지나기 전에 또다시 걷고 싶다, 그 길 위를.